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산 수학여행 참사 (문단 편집) == 사고 이후 및 여파 == 당연히 해당 학교는 무기한 휴교하고 학생들의 유해를 운구해 와 안치했다. 그러나 무려 1시간 가까이 버스가 불탄 탓에 학생들의 유해는 말 그대로 숯덩이가 되었고 많은 유해가 뒤엉켜서 도저히 신원 확인이 불가능해 유가족들이 공동장지를 요구할 정도였다.[* [[DNA]] 검사도 없던 시대인 1970년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희생된 학생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온 나라가 큰 충격을 받았고 당연히 그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당시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교육부]]) [[홍종철(1924)|홍종철]] 장관과 [[국토교통부|교통부]](현 [[국토교통부]]) [[백선엽]] 장관은 그날로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장관들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각각 이듬해 6월과 1월에 교체되었다.] 서울특별시 교육감도 사표를 냈으며 사흘 뒤에 중등교육과장과 경서중 교장, 교감 및 당시 교사 11명도 모조리 직위해제를 당했다. 17일에는 교장ㆍ교감과 3반ㆍ4반 담임은 파면되었고 나머지 교사들도 해임당했다. 그러나 교감은 이에 반발해 '''인솔 책임은 해당교사에게 있다'''는 취지로 행정소송을 걸었고 여기서 이겨 해임취소 판결을 받았다. 반면 서울시교육위원회는 버스 수학여행을 금지시키고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1인당 200만 원씩 지급하도록 했지만, 사고 버스회사는 2,700만 원밖에 보상금을 못 냈다. 치료비도 부족해 응급치료만 받고 끝내는 경우가 많았고 장기 입원학생들은 3등 병실에서 푸대접 속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문교부는 각급 학교를 시켜 '자발적 모금'이란 명분 하에 돈을 강제로 걷어냈고 당초 내걸었던 '고교진학 특혜 조치'도 잘 지켜지지 않아 생존자 27명 중 13명만 전기 고교입시에 합격했다. 생존자들조차 육체적/정신적 후유증이 심각해 경서중 부상학생 중 한 명은 1년 넘게 입원했는가 하면 전신 화상을 입은 이들은 1972년까지 수 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수술한 머리의 흉터로 인해 모자를 계속 쓰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